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조 히데키 자살 미수 사건 (문단 편집) === 체포와 자살 시도 === 9월 11일 도조는 늘 하던 대로 5시에 일어났다. 그날 前 53군 사령관 아카시바 야에조와 핀란드 공사관 주재무관 오노우치 히로시가 도조를 찾아오자 이들을 대접하면서 [[궁성사건]] 중 자살한 사위 고가 히데마사 소좌에 대해 이야기한 후 돌려보냈다. 아카시바와 오노우치를 배웅하다가 미국인 기자들이 집 근처에 또 몰려왔음을 눈치채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도조는 아내 가쓰와 다른 하녀를 친척집으로 보내고 자신은 호위병 하타케야마 시게토와 함께 집에 남았다. 오후 1시가 되어 지프차들이 도조의 집을 포위하더니 [[미합중국 육군]] [[미합중국 육군/군사경찰|군사경찰]] 30명이 나타나 마당을 배회하면서 집 내부를 감시했다. 이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을 보고 도조는 극도로 긴장하여 저들이 자신을 사살하려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했다. 도조는 사살당하느니 먼저 죽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 유언장과 권총 두 자루, 단검 하나를 꺼내고 응접실 구석에 육군 대장의 견장과 훈장 6개가 부착된 군복을 접어 놓고 옆에 군도 세자루를 세워 놓았다. 권총 중 한 자루는 .32 ACP 탄을 쓰는 [[콜트 M1903]]이었고 사위 고가 히데마사 소좌의 유품이었다.[* 고가 히데마사 소좌는 [[궁성사건]]에 참여했다가 [[할복]]한 뒤 이 총으로 자살했다.] 나머지 한 자루는 도조 자신의 것으로, .25구경으로 알려져 있다. 오후 4시, 미군 지프 2대가 현관 앞에 서더니 미 육군 군사경찰 수 명이 내려 미리 와 있던 군사경찰들을 지휘하여 현관과 응접실을 포위했다. 당시 군사경찰들의 지휘관이었던 폴 크라우스 [[육군]] [[군사경찰]] [[중령]]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를 듣고 도조는 권총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후 반팔 셔츠에 승마바지 차림으로 창문을 열고 체포영장을 가지고 왔냐고 물었다. 군사경찰이 영장을 보여주자 도조는 문을 열겠다고 하고 도로 들어갔다. 원래 도조는 군복 차림으로 죽을 생각이었으나 군사경찰들이 독촉하자 군복으로 갈아입을 시간이 없다고 판단해 소파에 앉아 오른손에 [[콜트 M1903]] 권총[* 총번은 535330으로,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에 있는 [[더글라스 맥아더|맥아더]]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을 쥐고 셔츠 사이로 심장에 그려놓은 동그라미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평소에 익숙하지 않은 오른손으로 쏜 데다[* 그는 [[왼손잡이]]였다. 도조 히데키 문서의 사진들을 봐도 검을 왼손으로 들거나 잡는 걸 볼 수 있다.] 발사 순간 총이 들리는 바람에 총알이 도조의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늑골을 뚫고 들어가 심장에서 약간 빗겨나갔다. ||[[파일:Tojo_suicide.jpg|width=100%]]|| || 자살 시도 후 치료를 받는 도조 || 한편 바깥의 군사경찰들은 총성이 들리자 도조가 최후의 발악을 한다고 여겨 총탄 수 발을 발사하며 응사했지만 다른 총알이 날아오지 않자 현관문을 뚫고 응접실 문을 부수어 들어갔다. 도조는 총에 맞아 안락의자에 머리를 떨어뜨리고 헐떡이며 권총을 쥔 채였는데 군사경찰들이 들이닥치자 겨누었으나 크라우스 중령이 쏘지 말라고 하자 권총을 떨어뜨렸다. 이때 아사히 신문 기자 하세가와 유키오가 외국인 기자들을 도조의 집에 안내하려다가 군사경찰들을 따라 도조의 응접실로 따라 들어왔다.[* 자살 시도 직후의 사진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도조가 미군에게 응급처치를 받던 중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미국인 기자가 하세가와에게 통역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세가와는 도조의 입에 귀를 대고 잠시 도조의 말을 경청했는데 하세가와는 그 말을 "한방에 죽고 싶었다."고 알아듣고 그렇게 옮겼다. 문예춘추 1956년 8월호에 실린 하세가와의 글에 따르면 도조의 말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한 방에 죽고 싶었다. 시간이 걸린 것이 유감이다. (...) 대동아전쟁은 정당한 싸움이었다. 국민과 대동아 민족에게는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법정에 선 전승자 앞에서 재판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의 정당한 비판을 기다리겠다. 할복을 생각하긴 했지만 자칫하면 실수할 수가 있다. 천황폐하 만세! 몸은 비록 죽더라도 호국의 귀신이 되어 최후를 마치고 싶다. 시체는 유족에게 인도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베니토 무솔리니/생애#s-9|구경거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맥아더에게 전해달라. ||[[파일:external/blue.ap.teacup.com/middle_1206315176.jpg]]|| || 도조의 말을 듣는 하세가와 기자 || 미 육군들은 도조를 살리기 위해 가까이 있는 에바라 병원의 의사를 불렀지만 의사는 도조의 자살을 돕고자 이미 늦었다는 이유로 응급처치를 거부했다. 맥아더는 도조가 자살하려 했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미국인 의사를 파견하여 치료하게 했다. 도조는 요코하마 혼모쿠의 소학교 강당을 개조해서 만든 미 육군 가설병원에 옮겨졌다. 도조를 살리기 위해 미 육군 병사의 [[헌혈|피를 수혈]]하고 9월 11일 심야에 이르러 도조의 용태를 정확히 진단했다. 그 와중에도 도조는 유동식을 거부하며 계속 저항했다. 한편 도조가 자살에 실패한 뒤 연합군 사령부가 유서를 입수했지만 외부에는 '재판을 거부하기 위해 자살한다.'는 내용이라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알리지 않았다. 도조의 유서는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의 국립문서관으로 직행했는데 1952년 유나이티드 프레스 기자 호프라이트가 <중앙공론>을 통해서 자세한 내용을 공개했다. ||[[파일:external/www.japanfocus.org/9.tojo%20rescued.jpg]]|| || 병원으로 이송된 도조 히데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